The Science 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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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기술’과 ‘윤리적 소비’의 만남[과학의 달 특별기고] 윤제용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 회장(서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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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용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 회장(서울대 교수) ⓒ ScienceTimes
빌 게이츠가 화장실에서 나온 오염된 물을 처리해서 먹는 퍼포먼스를 한다. 세계 최고의 부자, 첨단 기업의 오너가 갑자기 적정기술의 개발과 보급의 전도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세계 인구의 1/3이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살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인권과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Reinvent Toilet’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아프리카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을 위한 화장실 기술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적정기술 활동의 일환으로 개발도상국에 안전한 식수와 위생적인 화장실을 제공하는 등 국제 협력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런 활동은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잘 살게 되었으니 남들을 도와야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더 나아가 ‘짧은 기간에 빈곤을 극복하고 원조공여국이 되기까지의 경험과 지식을 세계인 특히 개발도상국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적극적인 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지도자들이 우리나라와 협력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 해결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원조를 시작하여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선진국들과는 무엇을 달리 해야 할까? 하나의 사례를 통하여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아이쿱의 ‘윤리적 소비’와 캄보디아 아이들의 ‘깨끗한 식수’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Scientists and Engineers Without Borders)는 지난 2009년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 나눔 활동을 목표로 자신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내외의 사회적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는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식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등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개발협력 NGO, 학교, 유치원, 고아원 등과 같은 단체로부터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NGO들이 그렇듯 늘 재원이 부족하다.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처럼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체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따라서 국내외에서 들어오는 절박한 요청을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2014년 어느 날 iCOOP(아이쿱)생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쿱은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으로서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조합원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넘어 윤리적 소비를 강조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이쿱 생협에서 상당수 조합원들의 요구에 따라 생수가 취급 물품으로 포함되면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으로 지목된 페트병에 생수를 담아서 파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라는 질문이다. 윤리적 소비자라면 생수병이 폐기된 이후의 뒷모습에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아이쿱 생협은 결국 조합원들과 페트병 마개를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페트병 1개당 30원의 생수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만일 2000명의 조합원이 한 사람당 10개의 페트병을 모으면 60만원의 비용이 마련되는 셈이다. 이 캠페인을 통해서 모은 돈은 어떻게 쓰면 좋을까? 안전한 식수를 구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도우면 좋겠는데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이것이 아이쿱이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와 연락이 된 계기가 되었다.
아이쿱에서 연락이 왔을 무렵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는 캄보디아의 다일 공동체로부터 아이들의 안전한 식수 공급을 요청 받아 먹는 물 공급을 위한 적정기술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다일 공동체는 시엔립 지역에서 매일 매일의 급식이 어려운 가난한 500여명 어린이들에게 하루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을 하는 선교단체(책임목사 최일도)이다. 초기 활동은 하루 1t 규모의 급수 장치로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500여명의 어린이와 공동체 봉사자들이 충분히 먹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어 급수 시설을 확장해야 했다. 재원 확보를 위해 고민하던 중에 아이쿱으로부터 반가운 제안을 받은 것이다.
아이쿱의 도움으로 작년 한 해 동안 캄보디아 씨엡립의 다일공동체, 돈보스꼬 기술학교, 깜퐁포 유치원, 꼭저 마을 등지에 아이쿱의 지원으로 먹는 물을 공급하는 정수 시설을 설치했다. 그 결과 4,000여 명의 사람들이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마시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활동에는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 소속 엔지니어인 박순호 팀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정수시설은 항상 사람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설치한 뒤에도 시시때때로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현지에 기술자가 근무하고 있지 않은 관계로 현장 방문이 어려운 현실인데 이를 보완한 것은 현지 봉사자들과 주민들이다. 어떤 기술도 완벽하지 않으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 때마다 카카오톡 같은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기술을 현지 실정에 맞게 적용하고 고치며 우리의 전문성도 발전하고 있다.
‘적정기술’을 통한 나눔 운동으로 확산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와 아이쿱의 협력활동은 후원 활동에서 교육 활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이쿱 생협 조합원들에게 캄보디아 활동에 대한 보고를 드리고 적정기술 워크숍을 열어 아이쿱 조합원과 자녀들에게 적정기술에 대한 교육도 가졌다. 가능하다면 캄보디아 현지를 방문해 정수 시설을 이용하는 현지 주민들과 아이쿱 생협 조합원들의 유대와 교류의 시간도 마련할 계획이다.
지난 한 해 동안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가 아이쿱 생협과 협력하여 활동한 사업의 규모는 작지만 그 의미는 참으로 놀랍다. 먼저, 국제원조라는 관점에서 보면 크지 않은 금액으로 4000명의 사람들에게 안전한 식수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개인의 기부금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후원금으로 추진했다는 점도 뿌듯하다.
흔히 개발도상국을 돕는 일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대규모로 지원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례는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적정기술을 통한 나눔 운동’(movement)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성공적인 활동의 이면에는 현지 NGO와의 네트워크도 매우 중요했다. 여타의 국제협력 사업을 보면 대개의 경우 지역조사를 시작으로 수요조사 후 사업 내용이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의 사례는 현지 주민들과 현지 활동 NGO들이 먼저 이러저러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구체적인 요청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적정한’ 기술을 구현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의 기술이 ‘적정’해지는 데는 현지 파트너의 역할도 컸다. 자신들의 요청으로 시작된 일이기에 항상 주인의식을 가지고 정수 시설의 상태를 점검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국 내 기술자들과 즉각 소통하면서 유지, 보수,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한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마을에는 이름을 대면 알만한 국제 단체나 선진국이 파놓은 우물이 방치된 채로 거의 50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려는 귀중한 마음과 재원들이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날 수많은 국제 원조 활동이 그러한 범주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직 속단하기에 이르지만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 사례는 이러한 문제점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감히 이러한 방식을 ‘한국형 적정기술 모델’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사회가 기억하고 있는 가난과 발전의 경험,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공감의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도우면서 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우리는 지금 배우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형 적정기술 모델’은 기술의 현지보급과 동시에 우리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나눔의 교육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겠다. ‘한국형 적정기술 모델’은 이렇게 시민 사회의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진정 발전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그 희망을 싹 틔우고 마침내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